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오래된 신도시, 분당·판교의 역사]①구석기 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생활에 적합한 입지이자 정치 군사적 요충지
[헤럴드 분당판교=신민섭 인턴기자(서울대)]분당·판교지역은 ‘신도시’ 이미지가 강하다. 유리벽으로 된 테크노밸리 내 IT기업들의 건물과 넓고 곧게 닦인 도로를 보면 이 지역은 ‘자연스레 형성된’ 곳이 아니라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곳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어떤 장소든 그 곳의 역사적 맥락 위에 서있듯이, 분당·판교 역시 이 지역만의 역사적 흐름을 지니고 있다. '헤럴드 분당판교'는 ‘신도시’라는 이미지에 가려진 지역 역사를 들춰보기로 한다.

◇구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
분당·판교를 포함한 성남시의 역사는 구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판교박물관의 진영욱 학예연구사에 따르면, 탄천과 그 지류인 운중천 변에서는 구석기·신석기 유물이 다수 출토됐다. 이는 탄천유역의 넓고 비옥한 평야가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생활하기에 적합한 입지 조건이었음을 방증한다. 곳곳에서 발견된 고인돌(지석묘) 역시 이 지역 사람들이 청동기 시대 때 이미 계급사회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삼국의 경합지이자 정치·군사적 요충지
성남시를 포함한 한강유역은 삼국시대 고구려·백제·신라의 주요 경합지였으며, 이에 따라 이 지역의 주인은 계속해서 바뀌었다. 본래 한성백제 치하에 있던 성남지역은 475년 장수왕의 공격에 의해 고구려 영토로 편입됐다. 백제 성왕이 이 지역을 잠시 수복했으나, 553년 성남지역은 다시 신라에 귀속됐다. 이러한 과정은 한성(오늘날의 서울)으로 통하는 관문이었던 성남지역이 당시 정치적·군사적 요충지로 중시됐음을 보여준다. 현재 판교박물관에 나란히 전시돼있는 한성백제와 고구려의 돌방무덤들은 국가 간 경합의 흔적들이자, 당시 이 지역에 꽤 큰 마을이 존재했다는 증거이다. 성남지역의 중요성은 통일신라 이후에도 계속된다. 전국이 9주로 정비되면서 한산주의 관할하게 놓이게 된 이 지역은 당나라군과의 대결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이미지중앙

판교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한성백제 9호 돌방무덤



◇서울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
이러한 군사적 중요성과 더불어, 성남지역은 교통의 요충지로서도 기능했다. 판교박물관의 진영욱 학예연구사는 “성남지역은 고려 및 조선시대 주요 교통로로 이곳을 지나지 않고서는 남쪽으로 가기 힘들었다”며 그 중요성을 언급했다. 고려시대 광주 목(牧)에 속했던 이 지역은 수로를 통해 강진과 부안 등 남부 지역에서 제작된 청자들을 대량 유통시켰다. 또한 판교원은 고려 말 공민왕 시기 주요 교통로 상에 설치됐던 다수의 원(阮) 중 하나로서 이 지역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분당·판교지역은 수운과 육로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로 서울로 가기 위한 관문이자 휴식처였다. 서울과 부산, 삼남지방을 연결하는 영남대로가 이 지역을 거쳤기 때문이다. 돌마면(突馬面, 오늘날 분당구)에는 낙생역(驛)이 설치되어 판교원과 더불어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이곳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거주했다. 임진왜란 직후 소멸된 판교원에는 이후 주막촌이 형성됨으로써 숙식제공의 기능을 이어갔다. 조선후기 운송책의 발달과 운송량의 증가로 분당·판교지역의 중요성은 더욱 높아졌다.

이미지중앙

조선시대 역참인 낙생역(樂生驛) 터. 현재의 수내동 중앙공원 앞 역말광장 일대에 해당한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낙생역지樂生驛址, 두산백과)



◇일제강점에 따른 교통기능 쇠퇴와 지명 변화
그러나 일제강점기 들어 교통의 요지로서 성남이 지닌 중요성은 감소하게 된다. 이는 당시 일본의 철도 사업과 맞물려 있다. 진 씨는 “성남은 분당의 일부 평지를 제외하면 대부분 구릉지대”라며 “때문에 당시 기술로는 성남지역에 철도를 놓을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결국 성남지역은 경인선, 경부선 등 당시 개발되던 철도사업에서 제외된다.

교통과 더불어 분당·판교지역의 지명 역시 일제강점기 당시 많은 변화를 겪었다. 1914년 ‘분당리(盆唐里)’라는 지명이 공식적으로 처음 등장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전까지 이 지역은 ‘낙생’ 또는 ‘판교’로 더 많이 불렸으며, ‘분당’은 당시 돌마면의 ‘분점리’와 ‘당우리’를 합한 합성어였다. 이러한 지명 변화는 일본이 식민통치를 강화하고 경비를 절감할 목적으로 진행한 지방행정제도 개편에 의한 것이었다.

참고문헌
민덕식, '朝鮮時代의 板橋 硏究', '鄕土서울' 제83호, 2013
성남시사편찬위원회, '성남시사', 2014
판교박물관, '성남판교에서 피어난 고려문화', 2014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분당의 땅이름 이야기', 1999

charliesnoopy@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